40년간의 침묵

 

며칠 전 퇴근하여 집으로 걸어가고 있던 중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무심코 받은 전화속의 목소리는 40년 전 고등학교시절 국어를 가르쳐주셨던 선생님의 목소리였다. 놀라움과 반가움이 뒤엉킨 순간이었다. 학교를 졸업한지 40년이란 긴 세월이 흘러갔지만  당시 가슴 아픈 사연으로 한마디의 이야기도 나누지 못하였던 선생님의 모습은 항상 내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떨리는 목소리와 전신의 경련! 피가 역류하는 듯한 심경을 허적거리며 선생님께 인사도 못 드릴 지경이었다. 무릇 사십년이란 세월이 흘렀어도 선생님의 목소리는 여전히 나의 가슴을 뒤흔드는 그 당시 그대로였다.

그래,

자네의  이름자가 삼수변에 먼저 선자(洗)였지.

항상 자네 이름을 기억하며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척이나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네. 자네한테 이야기하고 싶었는데..이야기 해보지도 못하고 헤어져 40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네만 왜 자네에게 물어보지 않았는지? 그것이 이제까지 마음에 걸렸었다네

자네도 나에 대해서 알고 있었나?

예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나?


선생님의 물음에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40년 전 선생님 앞에 당당하지 못하였던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지면서 쓰라렸던 그날을 회상하며 눈물이 앞을 가리고 말았다. 선생님은 함양군 백전면 출신이다. 내 생애에 가장 암울하였던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막내숙부의 친구이며 선생님과 친하게 지내시던 고향의 형님 한 분이 진주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에서 교편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따금 형님 집에 놀러 다니면서 막내숙부와 형님, 그리고 선생님이 함양중학교의 같은 반에서 공부했고 나의 아버지 鄭在元 선생으로부터 영어를 배웠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나 단 한번도 선생님에게  아버지에 대하여, 그리고 막내숙부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6살 때 아버지를 여의어 굳어져 버린 입술은 “아버지”란 단어마저도 이상하게 여겨져 누구에게도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었다. 당시 나의 생각으로는 초등학교 입학 전에 아버지를 여인 사람은 버림받은 사람이고, 초등학교졸업 후에 아버지를 여인 사람은 자기복을 받은 사람이며, 중학교졸업 후 아버지를 여인 사람은 천복을 받은 사람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막내숙부는 진주에서 직물회사에 재직 하며 친구 분들 중에서도 랭킹 1위로 아주 잘나가는 위치에 있었다.  신문배달을 하며 학교에 다녀야 하였던 뜨뜻하지 못하였던 형편에 있으면서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은 아버지와 잘나가는 막내숙부의 이야기를 선생님께 말씀드린다는 건 실가닥만큼 남은 자존심마저 짓밟는 것과 같았기에 침묵을 지키는 것이 최선이 선택이었다.


무릇 40년이 흐른 지난 5월 29일! 50여명의 고등학교 친구들과 남고졸업 40주년 기념으로 고향의 사근산성을 오르면서 처음으로 친구들에게 선생님과 아버지의 관계를 이야기 하였고 부산에서 올라온 친구들을 통하여 선생님이 함양에 계신다는 소식도 들었다. 하산하여 선생님과 자리를 같이 한다는 소식에 부풀은 기대를 하였으나 불행스럽게도 선생님은 직장암으로 부산 백병원에 수술을 받으러 떠나시어 사모님을 통하여 우리의 뜻을 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선생님은 부산남팔회 회장을 통하여 부산과 서울에 거주하는 친구들의 연락처를 받고서 나에게 전화한 것이었다. 내가 먼저 전화를 드렸어야 하는 것인데....


40년간의 침묵! 나도, 선생님도 마음속 한 구석에 서로 간직하고 있던 일을 40년이 지나서야 그때에 말씀드릴 수 없었던 아픈 사연을 후련하게 말씀드리면서 쓰라렸던 추억의 순간들을 뇌리에서 하나 둘 지워 나갔다. 선생님도 70세를 훨씬 넘었고 나 역시 60의 문턱에 선 시점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뼛속에 감추어질 이야기를 속 시원히 털어 놓고서 후련한 마음으로 하늘을 처다 보았다. 서울의 하늘에 오랜만에 일직선으로 나열된 세 개의 별빛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삶! 고난과 역경의 축을 이루었던 지난날의 아픈 추억들이 별빛 속에 빨려 들어가면서 후련한 마음으로 선생님의 쾌유를 빌었다.


2005년 6월 22일

선생님의 쾌유를 빌면서/정명선